승진 발표 앞둔 슬라이드, 영어로 옮기면 왜 힘이 빠질까요

승진 심사 발표든, 이직 후 첫 팀 소개든, 준비 과정은 대체로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한국어로 발표 흐름을 짜고,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그다음 그걸 영어로 옮기죠. 여기까지는 괜찮아요. 문제는 옮기고 나서 슬라이드를 소리 내어 읽어볼 때 옵니다. 뭔가 힘이 없어요. 분명히 내가 한 일이고 자신 있는 내용인데, 영어로 읽으면 남의 이야기처럼 밋밋합니다.
이게 실력 부족이라고 단정하기엔 좀 억울한 구석이 있어요. 문법은 다 맞거든요. 단어도 틀리지 않았고요. 그런데도 발표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래서 이 사람이 뭘 했다는 거지?"가 잘 안 잡힙니다. 한국어에서는 자연스럽던 겸손한 표현, 두루뭉술한 마무리가 영어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성과를 흐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은 이직·승진을 앞두고 영어 발표나 자기 어필 이메일을 준비하는 분들이 자주 놓치는 지점을 다섯 개만 짚어보려고 합니다. 문장을 화려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 제대로 전달되게 만드는 이야기예요.
"담당했다"를 be동사로만 처리하면 성과가 안 보여요
가장 흔한 패턴이 이겁니다. "나는 이 프로젝트 담당자였다"를 영어로 옮길 때 be동사로만 문장을 끝내는 거요. 틀린 문장은 아니에요. 그런데 be동사는 '상태'를 말할 뿐, '무엇을 했는가'는 안 알려줘요.
앞 문장은 "결제 시스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는 상태 설명이에요. be responsible for는 직책 소개엔 맞지만, 성과를 어필하는 자리에선 약합니다. 뒤 문장은 led(이끌었다)라는 행동 동사로 시작하고, 뒤에 구체적 결과를 붙였어요. 발표에서는 be동사로 '있었다'를 말하기보다, do 성격의 동사로 '했다'를 말할 때 성과가 훨씬 또렷하게 잡힙니다. 이게 be vs do 감각이에요. 자리를 설명할지, 행동을 설명할지 매번 골라야 합니다.
"도움을 줬다"는 helped 하나로 뭉뚱그리지 마세요
협업 성과를 말할 때 무조건 help로 가는 분들이 많아요. help가 편하긴 한데, 이 단어는 '내가 조금 거들었다'는 뉘앙스로 읽히기 쉽습니다. 실제로 주도했는데도 자기 역할을 작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한국어에서는 "온보딩 개선을 도왔다"가 겸손하고 무난한 표현이지만, 영어 발표에서는 내 기여도를 스스로 깎는 문장이 됩니다. 실제로 프로세스를 다시 설계했다면 redesigned를, 문서를 만들었다면 built를 쓰세요. 참고로 help는 뒤에 to를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지만, 요즘 실무 글에서는 help improve처럼 to를 빼는 쪽이 더 간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관사 하나로 "그 프로젝트"가 "아무 프로젝트"가 돼요
숫자나 결과는 신경 써서 챙기는데, 관사는 손이 잘 안 가죠. 그런데 발표에서 관사를 놓치면 청중이 "지금 말하는 게 특정한 그건가, 일반적인 얘긴가"를 헷갈립니다.
conversion rate 앞의 the는 "우리 서비스의 바로 그 전환율"을 가리켜요. 관사가 없으면 전환율이라는 개념 자체를 막연히 말하는 느낌이 됩니다. 반대로 A/B test 앞의 an은 "여러 실험 중 한 번"이라는 뜻이에요. 사소해 보이지만, 관사는 청중의 머릿속에서 대상을 특정해주는 신호등이에요. 이게 흐릿하면 성과의 윤곽도 흐려집니다.
과거의 성과인데 현재완료로 쓰면 시점이 흔들려요
이직 면접이나 발표에서 "제가 예전에 이런 걸 했습니다"를 말할 때, 시제가 자꾸 미끄러지는 분들이 있어요. 특히 현재완료(have + p.p.)를 습관처럼 붙이는 경우요.
현재완료는 '과거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거나,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경험'을 말할 때 씁니다. 그런데 last year, in 2024처럼 명확히 끝난 시점을 함께 쓰면 현재완료와 충돌해요. "작년에"라고 못 박았으니 그냥 단순 과거 launched가 맞습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5년간 이 분야에서 일해왔다"처럼 지금도 이어지는 경력이라면 I have worked가 자연스럽고요. 시제는 문법 규칙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일이 언제 일이고 지금과 어떤 관계인지를 가리키는 표시예요.
마무리 슬라이드의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영어로 옮기지 마세요
한국어 발표는 각오나 다짐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걸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I will do my best" 같은 문장이 나오는데, 영어 발표에서는 내용이 없는 마무리로 들립니다.
I will do my best는 정중하지만, 듣는 사람에게 남는 정보가 없어요. 영어권 발표 문화에서는 마무리에 앞으로의 구체적 방향을 담는 걸 선호합니다. plan to 뒤에 무엇을, 어떤 수치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넣으면 훨씬 신뢰가 갑니다. 다짐은 감정이지만 계획은 실행이에요. 발표를 닫는 문장일수록 이 차이가 크게 벌어집니다.
정리하면, 영어 발표에서 힘이 빠지는 건 대부분 실력이 아니라 '한국어의 결을 그대로 옮겨서'예요. 겸손한 표현, 두루뭉술한 마무리, 상태만 말하는 동사가 영어로 넘어오면서 성과를 가립니다. 오늘 본 다섯 가지는 다음 발표 자료를 열었을 때 바로 눈에 밟히실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직접 고쳐 써본 문장은,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검색 없이도 손끝에서 나옵니다. 내가 써본 문장만 내 것이 되니까요.